Uncomputable workshop 첫 모임 회고

최근 <계산할 수 없음 Uncomputable>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워크숍은 서울대학교 제23회 디자인문화국제학술대회 와 포에버 갤러리(Forever Gallery)의 협력으로 진행되는 워크숍이고, engineering & other books 워크숍과 동명의 책 알렉산더 갤러웨이의 Uncomputable을 메인 텍스트로 여러가지 이야기와 글을 나눈다. 첫 모임을 하고 적는 짧은 회고글.
계산할 수 없음(Uncomputable) 워크숍 첫 모임 회고
2025.11.09 11:00 - 16:00
포에버갤러리
일 년에 몇 없는 맑은 가을날, 아주 근사한 햇빛이 드는 포에버 갤러리에 서로 다른 배경과 관심사를 가진 열 명 남짓한 우리가 일요일에 모였다. 회고글로 어떤 내용을 써야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이런 저런 파편의 감상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갤러리에 동그랗게 앉아 이런저런 근황, 작업, 고민, 생각, 거짓말쟁이의 역설, 공리계, 자연수, 실수, 무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AI.. 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데이타임 엔지니어로 최근 4년간은 컴퓨터(모니터,키보드)로 뭔가를 투덕거렸다. 원래는 작업복에 목장갑끼고 나무 자르고, 실리콘, 스프레이칠을 해왔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태윤님이 흰 종이 하나, 검정색 수성펜 하나 들고 슥슥 드로잉하시는 걸 보고 그간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으로 뭔가 그려본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잠시 생각했다. 소프트웨어 설계 다이어그램도 온라인 화이트보드에 그리는게 익숙해졌던 참이다.
최근에 신형 아이폰을 강제로 새로 샀다. 애플에서 밀고 있는 리퀴드 글래스 디자인이 싫어서 꾸역꾸역 IOS 업데이트도 하지 않고 6년째 구형 아이폰을 쓰다가, 시도때도 없이 프리징되는 핸드폰 때문에 지도를 볼 수 없어 약속장소에 찾아가지 못하는 바람에 명동 애플스토어의 투명하고 거대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결제를 하고 나왔다. 리퀴드 글래스는 역시 별로다.
(끝내주는 식사와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실패할 과제를 하나 드릴게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오늘 답을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죠. 태윤님이 던져주신 과제가 시작됐다.
건물이 하나 있고, 건물 안에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방이 있다. 우리는 지도 하나를 가지고 이 방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필요할지 필요하지 않을지 몰라서 항상 이고지고 다니는 16인치 맥북프로를 가방에서 꺼내 책받침으로 쓰기로 했다. 어디있는지 모르는 방을 찾기에는 지금 이 맥북은 엄청 두껍고 무겁고 쓸모가 없다. 흰 종이를 맥북위에 겹쳐 대고, 수성펜을 손에 쥐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타건하던 열 손가락을 펜을 잡고 오므리는 힘으로 바꾸려니 어색했다. (오랜만에 글씨를 써서 그런가 글씨체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지도 하나를 가지고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방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 “공리(axiom)란 증명할 필요가 없이 자명한 진리이자 다른 명제들을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로서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가리킨다. 지식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나 근거를 소급해 보면 더 이상 증명하기가 곤란한 명제에 다다른다. 이것이 바로 공리이다.”
나는 방을 찾기위한 도구이자 인터페이스인 지도가 공리계라는 점에 착안해 방을 무조건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봤다. 만약 지도가 반드시 올바른 ‘참’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아무리 세밀하고 정교한 슈퍼지도라도 이 지도를 따라서는 방을 찾을 수 없겠다는 것이었다.
그럼 관점을 바꿔보자. 방이 ‘반드시 존재’ 하고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확보되었다면, 우리는 그 방이 어디 있는지 마음껏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지도를 그 ‘참’에 맞추어 다시 설정하면 된다.
방의 위치를 지도에 마음껏 표시해보자.
이제 우리는 지도의 ‘참’에 따라 방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
내가 떠올린 이 방법은 실패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못한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참인지 거짓인지 그 자체로는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터무니없음을 믿어주는, 일종의 ‘눈감아주기’가 아름다움과 발명의 시작이 된다고 믿는다.

(왼쪽) 드로잉하는 태윤님 손
(중앙) 만약 지도가 반드시 올바른 참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오른쪽)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방을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