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omputable 3,4장 리뷰
계산할 수 없는 3장 발췌 (Gemini 번역 바탕으로 의역)
디지털이란 무엇인가? 바퀴의 자기 와이어에서 디지털은 단순히 위 또는 아래의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디지털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위 또는 아래로 깜박이는 것은 0 또는 1과 같은 숫자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0과 1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개가 있다는 것 , 즉 위 또는 아래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디지털 정보는 가장 최소한으로 감지되는 차이의 양으로 구성되며, 구스타프 페히너가 한때 “방금 감지된 차이”라고 묘사했거나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차이를 만드는 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디지털은 어떤 종류든 일반적인 형태의 차이를 필요로 합니다.
더 일반적으로, 디지털은 하나가 둘로 나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연속적인 무언가가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디지털은 이원성, 즉 “둘을 만드는 것”을 나타내지만, 둘을 넘어 셋, 넷, 그리고 다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디지털은 구별 또는 이산화를 의미합니다. 디지털은 분리와 구별이 매체의 본질적인 기질을 형성하는 곳마다 발생합니다. 카야 실버만(Kaja Silverman)은 “둘은 존재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또한 이 상호 연결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라고 썼습니다. 여기, 자기 와이어에서 이원성은 자기 강도 간의 차이에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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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아날로그 컴퓨팅에서 디지털 컴퓨팅으로의 전환은 단 일성과 이진성, 비례와 구별, 곡선과 점프, 통합과 분할 사이에서 인간 문화 내에서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소규모 충돌 중 단 하나의 전투에 불과합니다. 즉, 하나가 둘로 나뉘는 시기와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매체가 이산적인 차이의“ 둘” 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디지털 계산에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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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쩐지 ‘디지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둘(twoness)에 대해 꽤나 오래 생각했다. 0과 1로 환원되는 표현 방식이나 모든 디지털이 아날로그의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는 점보다도, 연속적인 것이 끊어지는 것, 하나였던 것이 둘이 되는 순간, 차이를 만드는 차이에 대해서. 디지털의 본질은 ‘내가 아닌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는 감각에 대해서.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부터 GPT-3의 출시, 그리고 최근 엔비디아의 피지컬AI 모델 ‘코스모스’에 이르기까지, 돌아보면 지금만큼 인간 존재와 인간다움에 대해 이렇게 자주, 그리고 이렇게 가까운 일상 속에 떠오른 시기가 있었나 싶다. 마치 AI라는 거울이 어느새 우리의 온갖 경험과 감각의 틈에까지 들어와,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을 전 인류적으로—그리고 아주 미시적인 층위에서까지—일상이 되도록 만들어버린 것 같다.
이전 Uncomputable Introduction 북리뷰 를 쓰면서 휴머노이드의 인간적 외형의 채택이 자본주의적·경제적 관점의 범용성과 효율성 확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도, ‘인간’ 혹은 ‘생명체’를 닮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기능적이거나 효율성의 논리로만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오래된 감각과 충동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는 디지털에 특별히 현대적인 것이 없는 것There is nothing particularly modern about the digital. - 11.From One Or Two 후반부 발췌과 같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그 오래된 장면이 되돌아오는 순간일 뿐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닮은 표정, 관절의 미묘한 각도,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가질 것 같은 운동감은 우리 안에서 두 가지 상반된 감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물리적 몸체가 없는 특정 모델의 어투가 성능보다도 먼저 취향으로 선택되기도 하면서.
하나는 나와 같은 세계의 법칙을 공유하는 존재를 만났을 때의 일종의 안도다. 이건 영원히 불완전할 나의 프롬프트와 코딩 에이전트의 불가능성 속에서도, IDE의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이 ‘친구’를 그냥 한 번 믿어보고 싶은 기묘한 마음같은 것일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를 닮은 혹은 닮지 않은 존재로부터 오는 설명되지 않는 불쾌함이다.
반려로봇의 친밀감과 동시에 AI와 인공지능, 미래의 기술 발전의 속도에 떠밀리며 우리가 느끼는 공포나 경외감은 단지 인간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단번에 해낼 것이라는 압도감에서만 비롯되지 않을 것이다. 바리첼리의 공생 유기체 연구bionumeric organisms experiments가 결정론적인 알고리즘에 불과해 보이는 것은, 한정된 컴퓨터 메모리 확장성과 초기의 무작위성조차 제한된 규칙 아래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실험이 초기 인공 생명체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이런 순수한 계산 규칙과 패턴의 상호작용만으로도, 생명처럼 보이는 군집의 생성과 진화, 소멸 등의 복잡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바리첼리의 공생 유기체에서, 휴머노이드의 얼굴에서, 코딩에이전트를 친구처럼 여기면서, 나와 닮지 않은 존재—0, 1, 픽셀—에서 나와 닮은 존재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생명처럼 보이는 현상이 반드시 생명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해낼 때의 서늘함이 있다. 이때 경험하는 둘(twoness)은 단순한 이진법을 넘어 서로를 갈라서고 가로지른다. 충돌과 발전, 소멸과 탄생의 틈새에서, 생명과 비생명의 사이를,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 넷, 여럿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