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 엔지니어링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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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 프리랜서 예술가 백수는 왜 엔지니어가 됐나? 에서 이어지는 나와 엔지니어링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


원래 나는 비전공자이며 미술을 했었다고 소개하면, 디자인도 직접하고 프론트엔드 개발을 잘 하겠네요. 저는 미적 감각이 없어서 프론트엔드가 어려워요..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그러면 아 저는 디자인은 못하고, 순수예술 쪽이어서요.. 저도 시안이랑 제가 개발한 UI가 어디가 다른지 눈씼고 봐도 모를 때가 많아요.. 하곤 한다.

정말이다. 이건 시각예술 전공자로서도, 프론트엔드 엔지니어로서도 약간은 민망한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래서 크로마틱같은 UI 스냅샷 테스트와 피그마 데브모드, 크롬 개발자도구를 더 믿는다.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공간 설치, 퍼포먼스, 영상과 사운드를 결합한 작업들을 많이 했었다. 흔히 미술가의 작품이라고 하면 생각하는 회화(그림)이나 조각보다는 뭔지 모르겠는 그런걸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우리가 만드는 건 작품이 아니라 작업이라고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미술(작업)을 대하는 태도나 방법론이라고 하면, 일종의 고도로 세팅된 인터페이스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음껏 떠오르는 걸 표현하고 말하고 펼쳐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상황, 모습, 상태를 절묘한 찰나에 드러내는 전략을 사용했었다. (모든 예술작업자가 이렇게 작업을 하지는 않고 내 접근법이 이랬다는 의미다.)

나는 아름다운게 뭔지 모르겠어서, 모든게 가능한 복잡한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것들만 소거법으로 남겼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뭔가 아름다운걸 한데모아 완성시키는 작품이 아니라 이런 연구, 실험, 탐구, 실패, 상호작용, 감각과 경험 등등 일련의 과정을 포함하는 작업이 맞는다고 하겠다.

소프트웨어도 내게는 사실 프로덕트(제품)보다는 프로젝트(작업)에 가깝다. 예술이 감각하는 관람자 없이는 그 의미가 희미해지는 것처럼 소프트웨어도 유저없이는 그 가치가 작아진다.

다양한 직군의 커밋터가 프로덕트를 함께 만들지만, 특히 프론트엔드 엔지니어로서 나는 유저를 가장 먼저 만나는 인터페이스를 만든다. 눈에 보이는 부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플로우, 퍼널, 마우스나 키보드 손끝으로 누르는 감각과 경험까지를 설계하고 구현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이전에 스스로 배웠던 전략을 자주 사용한다. 소거법. 좋은걸 다 모아도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버엔지니어링을 피하고 진짜로 필요한 코드를 남기고. 엔지니어라면 매일같이 고통스러워하는 레거시와 기술부채, 프로덕션 운영과 리소스, 수많은 트레이드오프 사이에서 그때 그때 그럴 수 밖에 없는 최선의 모습으로 가꾼다.

이 소거법의 과정이 아름답고 순탄하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막막하며 낙심하고 실패한다. 때로는 타협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건 프로젝트가 어떤 형태로 되어야 좋을지, 어떻게 해야 정말로 의도한 경험을 설계할 수 있는지를 끝없이 고민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러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찰나의 순간들에 유저를 만난다. 그리고 유저와 좋은 소프트웨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는 엔지니어링이 과거에 내가 했던 예술과 닮은 작업일 수 있어서 좋다.

engineering & other books 심보선의 <그을린 예술>을 오랜만에 다시 읽다가 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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